언어는 자신의 의지(Will)를 말로서 (일종의) 표상으로서 객관화시켜 표현하는 도구이며, 철학은 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이자 틀이다.
나의 의지와 세상의 존재는 말로서 형용(형상화)될 수 있지만, 나는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즉, 나는 ‘세계의 의지는 나다’라는 표현이 성립된다.
쇼펜하우어가 바라보는 표상(Vorstellung)이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표상 안의 의지가 표상을 그저 객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즉, 예를 들자면, 의지는 그저 흐르기만 하는 전기에 불과하고, 표상은 전기가 통해서 발생되는 빛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위와 같은 해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의지는, 자의식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물론 칸트, 쇼펜하우어가 저술했을 당시의 사람들 또한 다름없이 자의식을 갖고 살았겠지만, 신앙교리와 윤리가 팽배했던 시절이기에 운명을 믿으며, 자연의 섭리를 따랐을 것이다. 즉,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시대상에 맞춰 저술된 표현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예로부터 존재하고자하는 의지를 굽히는 것은 금기시되어왔다. 이는 현대에 들어서면서, 일종의 ’병‘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의지를 굽힌다라는 표현 자체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는 의미를 달리하는 표현이 된다. 나는 이 ’의지‘를 현대적 인간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삶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 어떠한 형태로든(극단적일지라도) 굽히거나, 다른 방향을 향하게 할 수 있으니 자의식이 있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면 ’표상은 아직 그 순수함(Innocence)이 건재할까?‘ 라는 질문에는, 당연히 현대적 표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의지의 객관화가 표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반대로 표상자체가 의미를 품고있는 경우를 상정해서 말 할 수 있다. 현대적 표상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는 말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빌려 표현할 수 있다. 완벽한 이성적인 존재인 신은, 사변적으로 형용할 수 있는 존재이나, 의지나 표상으로서 형용될 수 없는 존재이나, 현대에 들어서 ‘죽음’을 신(당시 현대상을) 표현함으로서 일종의 의인화라도 할 수 있으며, 표상으로서 바라본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제는 의지가(인간이) 세계를(표상)을 객관화하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제는 인간이 인식을 토대로 삼아 자의식을 품고 객관화 하는 것이 현대적 표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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