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5-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수지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몇 년만에 만나는지 궁금했다. 아마 5년 만인 것 같았다. 열차가 6호선의 한 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차에서 내려 승강장을 따라 쭉 걸어갔다. 맨 끝에 그녀가 서있었다. 수지도 나를 알아봤는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키가 작았다. 그 동안 내가 많이 자랐으리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뭔가 변한 것 같았다. 수지는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어떤 순백색의 존재로 남아있었다. 그 때의 시간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으니까. 그녀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안녕."
수지는 의외로 꽤 밝은 얼굴로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응. 오랜만이네."
나는 그녀가 몇 년 전에 피아노를 그만뒀다는 것을 상기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키 많이 컸다."
수지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넌 아직도 그대로야."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잠시 키득대며 웃다가 지하철역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자연스럽게 수지가 알고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지하에 있는 꽤나 넓은 술집이었다. 가운데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좌식 테이블이 설치되어있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내부는 어두웠고 붉은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좌식 자리 위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담배를 팔 것 같은 술집이었다. 나는 그런 곳이 싫었다. 선곡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과일소주를 주문했다. 과일소주 또한 싫었다. 그렇지만 별 말없이 마셨다. 그녀의 취향이 왜 이렇게 싸구려가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나누며 웃었다. 그리고 옛날에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보고싶은 얼굴들이 많았다. 그녀에게 16mm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주니 꽤나 아쉬워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수지가 나를 왜 불러냈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이따금 잔을 부딪히며 얘기를 주고 받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할 얘기를 찾고 있었다. 갑자기 수지가 얘기를 꺼냈다. 다듬어 지지 않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자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지는 최근까지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했다. 그 남자는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는데 뭘 하는지는 몰라도 밖으로 나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타투이스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문신한 깡패였단다. 그 놈팽이는 수지의 신용카드를 하루 종일 긁고 다녔다. 엔제리너스 에서 일하는 그녀로서는 당연히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동거남의 권유로 남자들 술 상대를 해주는 바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나중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남자가 유부남이란 걸 알게 됐고, 결국 어제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그 남자에게 협박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얘기였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내리 깔고 그저 말없이 술잔을 잡았다 놨다만 반복했다. 가슴속에 쇳덩이가 들어온 것 같았다. 술 잔에 흐릿하게 내 지문이 묻은 것이 보였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말없이 손가락으로 소주잔의 테두리를 문지르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예전의 그녀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옛날에 그녀는 항상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빛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당장 머물 곳도 없다고 했다. 카드 빚을 감당할 수 없어서 유흥업소에 취직을 해 그 돈을 모두 갚겠다고 했다. 나는 화를 냈다. 도저히 그 얘기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힘들더라도 일단 부모에게 솔직하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어떻게든 만류하고 싶었다. 그녀는 거절하며 부모님들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리더니 빚을 갚으면 손을 씻겠다는 말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수지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수지는 항상 고집이 셌다. 그녀는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눈길을 피했다. 대화가 멈췄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수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주변 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얼굴이 조금 늙어보였다. 그녀가 입을 닫았다.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이거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지의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실망과 경멸과 원망의 감정들이 한데 섞여 내 뱃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빛나지 않는 두 눈이 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빈털터리 신세였다.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나의 경제적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 전체로 실망했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우리는 잔을 부딪히고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안주에는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 나도 그녀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수지도 술집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도 다 싫었다. 나는 술이 바닥났다는 구실로 그녀에게 술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어디로?”
그녀가 물었다.
“로베르네.”
그녀에게 가방을 건네주며 대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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