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내 단골 바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서 칵테일을 한 잔씩 마셨다. 하얀 타일 벽 위를 비추는 핑크 빛과 따뜻한 오렌지 빛 조명. 천장에는 미러볼이 돌아가고 있었다. 출입문 옆 벽에는 첫, 사랑 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이런 저런 시덥잖은 말들이 낙서되어 있었다. 냉장고 위에는 히피로 추정되는 벌거벗은 남녀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나는 바텐더에게 1979를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옛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볼이 발그레져서 미소를 짓는 수지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욕망은 뱀처럼 내 모든 의식을 휘감아갔다. 또 가슴 속에서 뜨겁게 끓어올랐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틋한 감정은 온데 간데 없었다. 난 수지와 자고 싶었다. 온갖 얘기를 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자고 싶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내 생각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신경이 쓰였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밤에 우리가 아마도 겪게 될 일을 간절하게 기대했다.

수지는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친구인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지는 그녀와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오늘 밤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하며 못들은 척 하고 있었다. 예거밤을 한 모금 마셨다. 달콤 쌉싸름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수지가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친구의 집에서 자겠다고 했다. 나는 무심한 척 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은 아주 작았다. 붉은 조명이 음침하게 켜져 있었다. 볼일을 봤다. 자그마한 세면대에 물을 틀고 손을 씻었다. 우울했다. 내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의 빨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수지만 변한 게 아니다. 아니, 정말로 변한 건 나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어지러웠다. 오늘 왜 그녀를 만나러 왔는가. 무슨 목적으로? 피하고 싶은 질문들이 내 가슴을 관통했다. 순간의 욕정으로 마지막 남아있는 아름다운 기억마저 더럽히려고 했다. 내 자신이 역겨웠다. 나도 수지도 더 이상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비참한 기분을 억누르며 화장실을 나왔다. 천장에는 미러볼이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와 서둘러 계산하고 바를 나왔다. 계단이 너무나 가파른 탓에 내려오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해야 했다. 수지의 손이 내 손등을 스쳤다. 그녀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줬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꼭 다시 피아노를 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미안해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수지는 택시를 타고 떠났다.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지하철 역으로 걸어 내려갔다. 속이 메스꺼웠다. 예전의 수지와 오늘 만난 수지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내 자신이 싫어졌다. 나도 변한 건 매한가지다.

  눈앞의 공간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것들이 나를 축으로 점점 쪼그라들면서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멀미가 나는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2호선 전철에 올라타 있었다. 전철이 멈추고 움직일 때마다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계속 뒷꿈치로 뒷사람의 발을 밟았다. 그 사람이 나를 경멸스럽게 바라볼 것 같았다. 그에게 사과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세상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보려고 해도 의식의 흐름은 기름과 타르가 섞인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딱딱하게 굳어갔다. 내 주위의 비틀린 공간들이 나를 짓이겨 버릴 것 같았다. 구토를 할 것 같았다. 전철에서 내렸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집 앞까지 가는 버스는 끊겼다. 꽤 오래 걸어야 한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나는 역 앞에서 담배를 한대 피우고 아이팟을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휠을 돌렸다. 음악을 들으면서 걸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갑갑한 전동차 안에 있다가 나오니 공기가 상쾌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이내 쏴 하고 시원하게 내렸다. 나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런 저런 노래들을 몇곡 듣다가 1979를 틀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왜 변했을까. 모두들 그런걸까.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중에 내 자신이 가장 미웠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 후회됐다.

 그때 수지는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나를 어두운 세상에서 꺼내주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따뜻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순백색의 그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릴 적의 아련한 기억처럼 항상 희미한 색깔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느낌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비가 계속해서 내린다. 온몸이 흠뻑 젖었다. 빗방울이 얼굴을 계속 때렸다. 나는 안경을 벗었다. 빗줄기가 세상을 모두 씻어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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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mm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수지는 내 손을 놓고 자리를 비웠다. 꽤 오래 기다려도 테이블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잠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 신경이 쓰여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올라 지하 술집에서 나왔다. 수지가 앉아있었다. 2층으로 오르는 첫 번째 계단에 걸터앉아 무릎을 껴안고 있는 채로. 그녀의 얼굴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향해 있었다.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바람이 조금 불어왔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났다. 지하에서 웅얼거리는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도 그녀 옆에 붙어 앉았다. 텅빈 거리를 빗소리가 가득 채웠다. 가로등의 불빛 앞에 무수히 많은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깨끗하고 기분좋은 소리였다. 빗방울이 도시를 깨끗이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뭐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앉아있어. 비오니까 좋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난 비 냄새가 좋더라. 비 오는 냄새 알아?"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너도 아는구나?"

수지가 상냥한 목소리로 경쾌하게 되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수지는 나를 보고 빙긋 웃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좋은 냄새가 났다. 나도 그 위에 머리를 포갰다.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부드러웠다. 그녀의 자그마한 엄지손가락이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남자처럼 손톱이 짧았다. 투박하지만 귀여운 손이었다. 나도 그녀의 손등을 간질였다. 행복했다. 밤은 길었다. 결코 끝날것 같지 않았다.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렸다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