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말씀드릴 건, 제가 라자를 사랑한다는 점이죠. 밤 새워 읽은 유일한 소설이고, 배가 아플 정도로 웃어댄 유일한 소설이죠.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이죠. 아, 그렇다고 제가 많은 소설을 읽었다는 건 아님다. 그냥 그렇다는 거죠.
2차례의 동일한 주제로 한 토론을 통해 얻은 생각의 편린들을 뿌리도록 하죠. 한번은 FantasyLand 카페에서, 또 한 번은 드래곤 라자 카페에서 했었죠. 아스피린 님, boreas님, 사이릴 님, 크낫사냉무가이 님, 아이라 님 등등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분들의 냉철한 반론 덕분에 제 허접한 논리를 좀더 가다듬을 수 있었죠. 에궁, 그래도 허접하고 두서가 없군요...;;
그럼 시작함다. 중앙일보에 나왔던 기사를 보면, 기존 문단인들이 드래곤 라자를 졸작으로 평가하는(혹은 싫어하는) 이유가 3가지 나옵니다. 약간의 무국적성(혹은 분위기), 퓨전 용어의 남발, 부족한 상황 설정. 이 가운데 나머지 둘은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이영도 님은 스스로가 밝혔듯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무국적성이나 퓨전은 너무나 자연스럽죠.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인 탈중심주의가, 단지 현상의 표피만을 본 체 거대하게 움직여가는 경제의 세계화나 디지털 자본주의나 물리학을 제대로 보지 못한 잘못이라고 여기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철학의 모자람이지 판타지 구성 요소의 미성립은 아니죠.
또한 개인이 표피적으로 느끼기엔 이 세상은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적이므로, 즉 온갖 사물이 단편적으로 뒤섞인 상태이므로 퓨전 용어나 약간의 무국적성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보고 있어요.
저는 후치 또한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넘 빨리 성장하고, 버릇없다고 하나, 이는 후치가 엄청난 모험을 겪은 농촌 무지렁이이기에 가능해짐다. 대단한 모험은 인간을 급성장시킬 수 있는 토양이고(게다가 칼에게서 이미 배운 게 있죠), 우리나라 옛 시골에서는(일제 이전) 9살 나이차까지는 다 친구처럼 지냈어요. 다른 나라 시골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도시 보다는 훨씬 정겨웠죠. 후치와 샌슨의 나이 차이가 바로 9살이죠. 후치가 샌슨에게 반말하는 건 헬턴트라는 촌동네에서는 매우 당연스런 일이었던 것. 조선을 느끼게 한다는 것. 이래야 한국적 판타지에 근접해갈 수 있겠죠.
문제는 부족한 상황 설정. 판타지는 내부 논리를 일관성있게 갖춤으로서 의미를 창출하는 장르죠. 환상은 환상이되 서로가 설정을 잡아먹지 않고 일관성 있게 나아감으로서, 세상에 대한 또는 인간에 대한 우화나 비유가 되는 거죠. 즉 내부 세계를 완전하게 갖춤으로서, 더욱 현실에서 멀어짐으로서, 그 자체로서 환상인 인간의 의식을 현실로 보내주는 것(판타지)이 되지 거죠. 이 부분에서 저는 라자가 모자란다고 여겨요.
때려맞추기식 설정이죠. 이영도 님은 톨킨의 중간계를 변형해서 썼죠. 톨킨식 판타지는 지구를 중간계로 바꾼 다음 그것을 환상적으로 그림으로서 도리어 현실을 강하게 이야기하는데...(중간계가 바로 지구라고 톨킨은 이야기한 바 있죠) 라자 세계를 보면 달이 두 개. 지구가 아님을 알 수 있죠. 중간계 역사가 지구 역사의 과거 이야기로 설정한 톨킨과는 이미 다른 것. (작품은 이성과 지식에서부터도 나오므로, 이같은 비판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슴다. 더욱이 라자에 여러 지식들이 들어가 있는 이상)
우선 신관과 마법사는 우리 세계의 성직자 및 지식인과 절대로 동일시 될 수 없어요. 그런데 라자 세계에서는 동일시되는 듯. 신관과 마법사는 실증되는 물리력을 지녔고 이는 단순히 정치 권력일 뿐아니라 생산력으로 작동합니다. 식생과 동물상이 문명의 생산력을 결정짓고 발전 과정을 가늠했듯 바이서스에서, 신관과 마법사의 초인적이고 자연 침탈적인 능력은 나름의 자본을 만들어내고 나름의 상징 체계를 구축(문화성)해나갔을 거예요. 그런데 그에 대한 고찰은 쥐뿔도 없군요.
만약 라자에 나온 설정대로라면 역사는 신관과 마법사의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었을 것입니다. 그 두 계층은 라자에서 극단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강대한 직업군이죠. 바이서스의 인구는 35만 명에 불과하고 마법사는 특출한 재능이 있어야하므로 적지만, 적은 대신 강하기에 자본과 권력을 낳을 수 있어요. 마법이나 신력이 생산을 할 수 있다면 마법사나 신관은 조금 더 많은 노동을 스스로 함으로서 더욱 큰 권력을 쥘 수 있죠.
단 2명만 있어도 권력 관계는 생기며, 권력을 막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권력 투쟁이며, 권력이 편재하는 이상... 권력을 마법사나 신관이 가지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세이크럴라이제이션도 결국 신관이 했을텐데, 질병의 신이 신관에게 벌을 내렸던가요. 레티의 신관들은 권력자 할슈타일을 잘도 도와주고요.
그런데도 라자에는 신관은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고 나온다는군요. 마법사는 핸드레이크나 솔로쳐의 전통 때문에 잘 간다고 했으나 그것 역시 태부족. 그런 전통이 오래 간 일이 역사상 있던가요. 왕권이나 귀족권과의 대립을 말씀하셨던 분도 계셨어요. 글나 중세에 있어, 평민은 자식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영주에게 돈을 내야 했고 역사적으로 볼때(나라와 시대를 막론하고) 성직자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었죠. 마법사를 학자로 단순화하면 역시 마찬가지. 공부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죠.
라자 세계의 설정에선 신관이나 마법사가 스스로 돈벌이를 할 수 있지만, 수습 과정에선 돈을 못 벌거나 적게 벌죠. 그러므로 이를 지탱하려면 수업료를 지불할 필요성이 생기는 데 이는 부자들(아무래도 귀족 가운데 많을)만이 쉽게 낼 수 있어요.
귀족들이 자기 친척들일 신관이나 마법사를 거부할 리 없는 것. 결국 하나의 체제 아래 묶이게 되죠. 귀족들 내부에서도 투쟁이 있던 것처럼, 신관과 마법사가 한 체제의 내부에 있을지라도 권력 투쟁은 가능하죠. 이기적인 인간(신관, 마법사도 포함됨)이(이는 라자의 설정)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면(이도 라자의 설정) 설정끼리 잡아먹는 게 되요. 이같은 근본적인 인간성(정치성)에 관련된 설정이 이렇다면,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고찰이 떨어지게 되죠. 이는 라자와 워커(동일 세계관을 가졌다고 가정할 수 있는)의 비교에서도 드러나죠. 라자에서는 인간이 신을 만났다는 대목이 잠깐 나오고, 워커에서는 한 신관이 유서를 쓰면서 내세를 부정하죠. 내세 부정. 영혼 불멸 사상은 내세나 신보다도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특성인데 이를 부정하면 도대체 뭐가 종교일 수 있는지. 영혼 불멸이라는 강력한 소망을 배제당한 세계에서 어떻게 종교가 가능한지.
만약 그게 라자 세계가 무신론적 세계라는 증거라면, 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때엔 불가지론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이야기할 수 밖에 없죠.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비역사적인 종교관. 종교성이라는 인간성의 주요한 대목을 이렇게 바꾼다면,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 모자라게 되는 결과 밖에 초래할 수 없는 것. 도시화가 진행되면, 관료 군인 예술가라는 직접 생산하지 않는 계층이 생기죠. 이 중 관료가 다름 아닌 신관이었는데, 그들은 국가라는 배타적인 결사를 지키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몄죠.
종교(여기서의 종교는 교회)는 태생부터가, 정부의 정복 활동을 정당화시키고 희생을 미화시키기 위한 도구였죠. 그런 교회를 권력이 가지지 않는다고 하면 상징적으로도 곤란한 것. 신은 집단적 자기 숭배라는 토인비의 인식에서도, 볼 수 있듯 신은 "강한 인간"이며(이는 라자에서도 나오죠) 권력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데 신관이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면 상징적인 넌센스죠. 판타지는 상징 게임의 성격이 짙음에도 말이죠.
또한 톨킨의 The Lord of Rings에 모티프를 제공한 것들 중 하나인 플라톤의 '가게스의 반지'에서 보이듯 반지에 부여된 투명 마법은 권력의 상징. 즉 마법 또한 전통적으로 권력의 상징이었던 거죠.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인간을 동물로 바꾸는 키르케의 이야기를 보면 마법이 인간을 옥죄는 권력임이 느껴집니다.
즉 마법사와 신관이 권력을 안 가졌다고 한다면, 그건 판타지라는 장구한 전통이 그동안 사용해온 상징 체계(그것도 주요한 부분에서)를 부정하는 꼴이 되죠.
자아 개념은 근대성의 산물. 근대화가 일으킨 개인주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이죠. 인간의 발전은 문명의 발전인데, 이는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몸 성분을 실질적으로 일부 변화시킬 뿐아니라 정신 또한 변화시키기 때문이죠.(앞으로 유전공학이나 인격공학이 발전하면 더욱 쉬이 느낄 수 있을)
그런데 자아 개념이 그렇게 툭툭 튀어나와서는 시대에 맞지 않죠. 라자 시대는 중세가 아니지만, 또한 근대화가 그리 진행되지도 않았죠.
이번엔 에피소드 몇 개만 딴지 걸죠. 제 1장에서 자못 희극적으로 그려지는 헬턴트 영지의 약간 바보스러운 선정과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트의 폭거는, 공자가 논어에서 일갈한 <사악한 정치 보다 호랑이가 낫다>는 내용의 패러디라 볼 숭 있죠.
그런데 고작 1년에 사람 몇 명 잡아가고 활 몇 대 맞으면 죽어버리는 호랑이랑, 몬스터 군단을 끌고 다니고 악마적 지능과 신적 권능을 가진 아무르타트를 동급으로 놓는다? 기가 차지 않습니까? 이런 설정대로라면 헬턴트 사람들은 다 도망가야 옳은 겁니다.
아무르타트는 헬턴트 밖에선 그리 활동 안 합니다. 딴데로 가면 되겠죠. 헬턴트 영주가 지나치게 선정을 베풀긴 하나 그 정도 반대급부로 여러 사람들이 자꾸 죽어나가는 상황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 더욱이 아무르타트는 상당히 오래 있었는데(후치의 어머니가 죽은 것으로 보아) 그동안 다 달아났을 가능성이 높죠. 혹은 엄청 삭막해지거나.
그런 지긋지긋한 폭력적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로 생존을 위한 협동을 하게 되면 얼마나 삭막해지고 무시무시한 긴장 상황에 놓이게 되는 지 모르는 모양이에요. 아무르타트는 장구한 세월동안, 바이서스, 자이펀, 헤게모니아의 서쪽을 향한 팽창욕을 막은 가공할 괴물인데 그 정도 타격 밖에 안 받을 수 있을까요.
사실상 범죄라 할 수 있는, 폭력의 희화화를 했으니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만약 그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어보았다면 일상적이고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친밀함의 증표로 쓰지 않았을 겁니다. 퓨처 워커나 폴라립스 랩소디에서는 다행히도 많이 시정된 것 같지만. '코스모스'에 나오는 정신 심리학자 프레스코트의 폭력 사회 이론을 보면, 유아기나 사춘기 때의 성적 접촉의 억압이나 체벌을 긍정하는 사회는 폭력 사회가 됩니다. 폭력 사회에서는 살인, 도둑질, 강도, 조직화된 종교와 이념, 사치, 허영, 미신, 광신 따위가 마구 날뜁니다. 이런 뜻에서, 이 사회에서 이른바 어린이의 순진함을 지킨다느니 청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느니 어떤 의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긍정되어 한다느니를 말하고 실천하는 자들은 범죄자들입니다.
제 2장은 혁명 이론인데, 일단 사회가 뒤집힌 다음에도 지금의 존재론상 곧 옛 지배 세력과 비슷한 작태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부의 몇 몇 인간적인 영웅이 혁명을 주도하면 그 사회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며, 가뜩이나 유지되기 어려운 혁명의 정의가 그럴 경우 더욱 깨지고 비틀리기 쉽다는 점에 대해서는 눈꼽 만큼의 성찰도 내비치질 않더군요. 혁명하면,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의 그것을 빼뜨릴 수 없죠.
떠나버린 신들에게서 여덟 개의 별을 받아 지상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드래곤 로드는 만물을 오롯이 지배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지배가 허물어지겠습니까? 전혀! 혁명은 이 지배자가 안락한 예속을 줄 수 없다고 대중이 느낄 때 비로소 제대로 일어납니다. 혁명이 권력 이동이란 건 당연하죠. 드래곤 로드에게 대중이 안락한 예속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는 언급은 나옵니다. "마법은 발달했고, 경제는 번영했다..."
그런데 뭐하러 대중이 반란을 일으키죠? 편한데... 오거가 만약 사람을 잡아 먹는다면, 그 잡아먹히는 사람은 왕따일테니 불만이 나올 것 같지는 않고 말이죠. 만약 그런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건 불행합니다.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가 에잇 스타땜씨 니네가 더 발전 못 한다고 떠들어봤자, 당장 편한 사람들이 거대한 적(드래곤 로드)에게 대항하며 불확실한 발전에 목숨 걸 것 같습니까?
저는 드래곤 로드에 대한 인간들의 혁명이,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라는 두 인간의 실패한 욕망에 바쳐졌다는 점에서 정말 쓰잘데기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이상적인 인간 설정.
이영도 님은 드래곤 로드를 단지 자연의 상징 정도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는 자연이 아니라 라자 특유의 캐릭터 가운데 하나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우선 자연은 통합체가 아니죠(즉 통합된 상징을 쓸 수가 없다는 뜻).
자연은 비정하죠. 생태계엔 식물만 있어도 잘 굴러갈 수 있어요. 식물들끼리 경쟁해도 도태될 자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가죠. 그러나 동물이라는 것들이 식물을 탐하고, 미생물은 찌꺼기를 먹고 삽니다. 이들 생산하지 않은 체 남의 걸 빼앗는 동물이나 기생자, 미생물등을 흔히 얌체라 하죠. 또한 이 시스템은 매우 비효율적임다(먹이 피라미드 위로 갈수록 잃어버리는 에너지는 방대해지죠).
개미들이나 꿀벌들의 세계 역시 권력 투쟁이 판을 치죠(에드워드 윌슨, 개미). 가이아 이론이라는 건 결국 지구 전체의 변화(이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으로 일어나죠)를 주도한 생물이 아닌 변화에서 이득을 얻은 생물이 생태계를 점거해나간다는 이야기죠. 사회생물학은 생물이 이기적이라는 것이고. 포유류, 속씨식물, 조류, 곤충은 힘을 합쳐 공룡, 겉씨식물에게서 생태계의 패권을 빼앗습니다. 그 결과로 중생대에서 신생대로 넘어갔죠. 99%의 생물종을 궤멸시킨 생태계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죠... 우주는 빅뱅(모든 걸 흩어버리는!)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태어났구요. 동물들 또한 나름의 인식, 감정, 체계를 갖추고 학습도 할 수 있음이 오늘날 생물학의 인식이죠. 인간은 결코 이 세계에서 독특하지 않아요. 수많은 닮은 꼴들 중의 하나일 뿐.
그런데 라자에선 마치 특별한 것처럼 취급하죠. 루소식 자연주의. 그 구닥다리 사상. 그런 옛 사상을 어쩌자구 수많은 이들의 머리에 흩뜨린단 말인가.... 흔히들 인간성을 인간 속의 자연이라 부릅니다. 인공적인 사물 또한 자연 현상이라고 보므로, 모든 건 자연이지만, 이는 인간성이 더욱 자연적임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루소식 자연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떼어 생각하는 사상이며, 이를 사용한다는 것부터가 라자에서 인간성 고찰이 떨어지게 되는 거죠. 앞에서 이야기한 부분, 신관과 마법사가 권력 투쟁을 하지 않았다.
이를 타이번(=핸드레이크)의 300년에 걸친 공작 때문에 권력 투쟁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나 단 한 사람이 300년 동안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그게 선이든 악이든)을 억눌러 왔다는 시각(음모론)은 과거 전체주의 체체에서나 가능한 거죠.
전체주의 체제에서도 그런 시각은 단지 받아들여졌을 뿐, 역사는 여전히 수많은 것들의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져 왔죠. 그런데 타이번 하나가 그걸 모두 억눌러 왔다면, 그 세계는 불행한 것.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인 거죠. 만약 정말 타이번이 라자 설정의 안전 장치라면, 그는 단지 또다른 드래곤 로드일 뿐이죠.
또 하나, 역사성 또한 인간성의 주요한 부분. 이것이 잘못된 이상 인간성 고찰은 떨어지는 것. 근거 : 타이번이 후치에게 한 말. "나는 너희가 모르는 여러 가지 일을 했지." 그런 투로 말했죠. 타이번이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인간이 아니라 본다면, 이 세계는 닮은 꼴이며(프렉탈 이론) 모든 판타지의 종족들은 인간성의 모조에 불과하다는 걸 지적해야 겠네요.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을 벗어날 수 없는 법.
이밖에도 설정끼리 부딪치는 지점들이 있을 것이나 알아서 찾아보세요^o^ 설정이 이렇다면, 즉 내부 논리가 엉망이라는 건 결말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뜻하죠. 철학 소설로서는 결말에서 다 아는 이야기를 괜히 몽환적으로 하고 있지만, 성장 소설로서의 결말은 나름대로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헬턴트 영주가 상징하는 평화로운 가정으로부터 나와 세계의 잔인한 속성을 깨닫는 소년.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무르타트에게 빼앗긴 후치는, 또다른 가정에 들어가 그속에서 평온을 얻죠. 그러나 수많은 모험을 겪으며 세계의 잔인함을 깨닫는데, 이는 아무르타트를 통해 절정이 됩니다. 이 대목, 확실히 감동적이죠.
그러나 재미와 감동은 작품성의 일부일 뿐 작품성을 보장할 수는 없죠. 라자와 같은 세계관을 써서 그런지, 퓨처 워커 역시 모자라더군요. 미의 예언은,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행위죠. 신스라이프는 영생을 통해 미의 권능을 빼앗죠. 그래서 미는 스스로의 권능을 찾기 위해 신스라이프(神's life)의 의지를 깨뜨립니다. 그 덕에 미라는 개인의 행복은 말살됩니다. 어째서? 이는 라자나 워커의 캐릭터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
살아있는 욕망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운차이나 네리아와는 달리) 개념에 불과하기에, 드래곤 로드나 이루릴이나 엑셀헨드는 자연적이지 않고 칼은 그토록 기이할 수 있는 것. 드래곤 라자는 그렇기에 상징일 뿐 인간이 아닐 수 있는 것. 퓨처 워커 미는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는 것.
그렇게 해서 얻는 성찰은, 단지 관측자 우주론(관측 행위가 모든 걸 결정한다)이라는 양자 역학적 망상으로 인과론을 대체하고, 신스라이프의 환상적인 영생으로 현실적인 미생물의 불사(살해당하지 않고 제때 자양분을 공급받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를 대체하는 거죠. 미생물의 불사야말로 우리가 과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전부죠. 차라리 기계의 불사인 이것만이.....
이미 그것 자체로서 충분히 비루한 미생물의 불사만이 우리가 갈 길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나타내기엔 충분한데 무슨 신스라이프의 환상적인 영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관측자 우주론은 단지 관측 행위의 한계를 이르는 것에 불과한데, 그게 어떻게 우주의 법칙일 수 있는지. 의사소통이 서로 서로 맞춰 나가는 것 이상의 뭐란 말인지...
상대성 이론에 의해 계측될 수 있는 것으로 전락한 시간을, 똑같은 상대성 이론을 쓰는 척해서 또다시 환상적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라자와 워커에선 자주 보입니다. 과학을 내세우면서 도리어 미신으로 숨는 거죠.
궁극의 장르인 SF를 따르는 척하며 그저 SF 판타지를 행하는 것. 비현실성은 결코 환상성이 아닙니다. 환상성은 현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죠. 현실의 극단적인 왜곡을 통해 도리어 현실을 더욱 리얼하게 느끼게 해야 하기에.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체험을 줘야 하기에. 라자는 결국 The Lord of Rings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AD&D이라는 게임 설정북을 따랐을 뿐.....
허허
한마디로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는 거네요.
게다가 라자는 안 읽었지만 이 글만 봤을 때 확실히 일리가 있는 지적 같음. 안 봤으니 결국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계의 선두자이며 실력자인건 인정해야지
국내에서 판타지 소설을 쓰는 대부분의 작가는 오락물로서 재미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작품을 쓰는 경향인 반면에 이영도는 먼저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나 이야기가 있고, 판타지 소설은 표현수단이라고 한다. 따라서 문인으로서의 색이 강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