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이 있다.
한때는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사랑하던 부부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서로를 향해 독기 서린 시선을 보내며 법정 다툼까지 불사하는 적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때 서로의 전부였지만, 이제는 서로를 파멸시켜야만 속이 풀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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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국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은 히말라야 국경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충돌한다. 경제적으로는 서로 의존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절대로 서로를 믿지 못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태국과 베트남이 대표적인 앙숙이고, 이슬람권에서는 시아파의 이란과 수니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서로를 위협하며 견제한다. 터키와 그리스는 지중해의 섬들을 두고 수십 년간 갈등을 반복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적대는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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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과거의 유럽은 국경을 맞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서로의 적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폴란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까지, 오늘날의 유럽 연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웃’이란 단어는 곧 ‘경계하고 의심해야 할 존재’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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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아무리 중국이 권위주의적인 일당 독재 체제라고 해도, 예컨대 파라과이나 우루과이를 침공하자고 주장한다면 시진핑조차도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중국 국민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멀리 있는 나라를 왜 굳이 침공해야 하지?”
감정도 없고 역사적 기억도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전쟁 명분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하지만 대만 문제만큼은 다르다. 이 경우에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분리주의를 단죄해야 한다”는 식의 선동이 국민들의 지지를 쉽게 얻는다. 감정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갈등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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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를 보고 있으면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갈등은 거리가 멀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서 생긴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감정이 얽히고, 역사와 문화가 겹치고, 이해관계가 중첩되며, 심지어 정체성마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국제관계뿐 아니라 인간관계,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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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터키는 서로를 싫어하지만, 음식문화나 민족 감수성, 음악과 춤, 유머 코드까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그리스의 수블라끼는 터키의 케밥을 돼지고기로 바꾼 것에 불과하며, 그리스의 기로스는 터키식 되너 케밥과 사실상 동일하다.
그리스 민속 음악에서 사용되는 부주키는 터키의 사즈에서 유래했으며, 양국의 민속 무용은 박자와 리듬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서로 너무 닮았기 때문에 더더욱 인정할 수 없고, 그 닮음을 부정하기 위해 더 강하게 배척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적대는 종종 깊은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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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부 사이가 갈등으로 치닫는 이유는 대개 너무 멀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가까워지려 했기 때문이다.
사소한 생활 습관, 말투, 취향 차이 같은 문제들이 처음에는 사랑스러운 개성으로 여겨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참을 수 없는 결함으로 느껴진다.
자녀 문제, 경제 문제, 시댁과 처가 문제 등 일상의 크고 작은 결정들이 모두 부부 사이의 충돌로 이어지기 쉽다.
그들은 사실 서로에게 무관심한 남보다 더 큰 기대와 애정을 품고 있었기에, 그만큼 더 쉽게 상처받고, 더 치열하게 부딪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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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는 인간의 삶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비유했다.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인간관계란 괴로움과 외로움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사람과의 갈등이 두려워 관계를 피하고 혼자 지내다 보면 외로움이 찾아온다. 반대로 외로움이 싫어 무리해서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하면 언젠가는 갈등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 진자 운동은 결국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각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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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관계가 적은 사람이 외로워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매일같이 누군가와 갈등을 겪으며 사는 사람이 피곤해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이는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또 다른 이는 기꺼이 관계의 파도 속으로 나아간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어떤 관계의 밀도와 속도를 원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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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갈등은 결국,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된 결과다.
그러니 갈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관계가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굿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