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고, 누구나 쉽게 간단화할 수 없음. 예를 들어 고차미분방정식의 해를 구하려면 합차곱분은 물론이고 방정식, 함수의 개념을 비롯해 다양한 수학적 원리와 지식을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임. 그런 것들을 배우지 않고 저 문제는 풀 수도 없고, 자신이 단번에 이해할 정도의 명쾌함을 주는 해답은 어디서도 듣지 못함.
하다못해 수학문제도 이런 정도인데, 선과 악에 대한 문제는 어떨까? 논리라는 건, 그 명제를 구성하는 존재인 대상을 대상으로 규명하는 행위임. 즉, 우리가 그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알 수 없다면, 그 대상에 대한 논리적 명제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의미임. 수학은 모두가 공통으로 약속한 "수학" 이라는 체계 내에서의 존재들을 재료로 삼아서, 그 존재들의 내적 정합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논리학임. 수학이 다루는 수라는 존재의 본질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하나의 단위이기 때문에 그 존재의 본질이 수학이라는 체계를 넘어설 수가 없음. 수는 수학을 위해 탄생한 개념이기 때문에, 수학이라는 체계에 딱 들어맞는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완벽한 존재라는 의미임.
반면에 선과 악을 다룬 문제는 체계 자체가 다름. 선과 악 뿐만 아니라 세상에 어떤 "형체"나 "현상"으로써 투영된 본질을 명제로써 다루는 것은 수학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의미임. 왜냐면 수학과 달리 삶에서 마주하는 존재들의 층위는 단면적이지도 않고, 수처럼 수학이라는 학문 체계 내에서의 기능적인 역할로서의, 맥락성 만이 그 존재 자체의 본질이자 전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임. 인간이 만들어 낸 수라는 개념은 수학이라는 체계 내에서 사용되면 그만이지만, 실존들의 개념은 그 입체성과 깊이가 다르다는 의미임.
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 바로 플라톤이 이야기 한 이데아이며, 칸트가 이야기 한 물자체라는 개념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함. 내 눈 앞에 있는 포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맛있는 것? 물렁한 것? 보라색의 형체? 물컹한 것? 각 사람이 가진 경험과 인지 능력에 따라 포도에 대한 자신의 판단은 다 다를 수 밖에 없음. 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인지로 규정한 포도의 실체는, 인간이라는 주체와 포도라는 객체가 인간에 의해 식별될 수 있으며, 식별된 교집합 부분의 범위에만 해당이 될 뿐임. 그리고 그 마저도 인간이 머리 속에서 포도라는 실존에 대한 인지 현상으로써 복제된 하나의 상(像)일 뿐, 포도 그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는 의미임.
즉, 변증이 만능이 아니라는 의미임. 변증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큰 착각이란 의미임. 내가 포도를 봤을 때 나의 오감에 의해 감각되는 여러 오감적 이미지와 그에 대한 인간의 감상, 경험은 그 포도를 감각했을 때에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 변증의 대상이 아님. 또한, 마치 3차원의 존재가 3차원의 세계 안에서 4차원, 5차원 이상의 존재를 온전히 그 존재가 내재적으로 수반하는 차원에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함. 단지 3차원이라는 차원 내에서 "일부"로써 투영된 3차원적 형상을 통해 그 4,5차원의 존재를 알 수는 있을 뿐이지. 4,5차원의 체계 안에서 4,5차원의 관점으로 그 존재를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임.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 존재들이 바로 3차원 그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임. 언어로서, 논리로서 명제에 투영된 존재들의 관계와 그에 대한 판단이 참, 거짓여부와 별개로 그 존재들의 본질이 언어나 논리가 완벽하게 반영할 수 없는 층위에 걸쳐 있다는 의미임. 또 한 가지 문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종족적 주관의 한계임. 사람들이 팩트라고 부르고, 객관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가 그것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과 능력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같은 종족인 인간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이에서 비롯되는 보편성이 마치 사실과 객관성이라는 표현으로 절대화되고 있다는 의미임. 변증 역시 이 종족적 주관의 한계 위에서만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은 마치 저런 악의 문제가, 몇 가지 명제로 구성된 문장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또 전혀 계량화 되어 있지 않은 존재들로 구성된 문장이라고 해서 이에 대한 답 역시 간단할 것으로 착각을 함. 정의, 선, 악, 자유, 책임, 평등, 사랑... 인간들이 입으로 잘도 쉽게 내뱉고 운반하는 비가시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들에 대해서 인간이 제대로 알고 이야기할까? 저 가치들의 실체를 인간은 제대로 알지 조차 못함. 근데 저 가치들을 "논리" 라는 구조 안에서 투영해 내고 저들의 실체를 규명하려고 한다고? 그게 가능하려면 최소한 논리라는 구조에 투영되고 정리될 만큼의 질료들을 올바르게 지각, 분별해낸 경험과 더불어, 사유 주체로서 자신이 갖는 한계를 뚜렷이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조금이라도 흉내는 낼 수 있다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넘겨버리기 쉽상이면서, 간단한 답을 원함. 그런 세상은 없어. 성경에 나오는 욥은 자신이 느끼기에 부조리하고 말이 안되는 비극과 모순에 대해서 절망하는데,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욥기 38:2부터 시작됨. 하나님이 직접 욥 앞에 나타나셔서 대답하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임. 하나님의 대답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의미야. 하나님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수준 차이가 논하는 것 자체도 황당할 정도로 의미가 없음.
알면 알수록 머리 아프고, 배우면 배울수록 끝이 없는 게 이 세상임.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거나, 그걸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음. 근데 마치 그 이해와 이성이 전부인 것 마냥, 자기가 그걸 모두 손에 움켜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마냥, 그 수단을 통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그 맹목적인 건 안타깝다고 생각함. 물론 인간은 꼭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라 당연하고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납득하지 못한다고 배제해 버리는 건 종교를 떠나서도 그냥 어리석은 사람일 뿐임. 자신을 슬기롭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같은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시는 것,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게 보는 것. 그게 십자가의 도임.
의심이나 이해를 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란 건 아님. 오히려 그럴 자유가 있음. 하지만 그게 신앙의 본질이라고 착각하지는 말길 바람. 중요한 건 너에게 구원자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여부일 뿐이지, 얼마나 기독교가 잘 이해되고 납득 되는가가 아니란 이야기임. 그 이유는 기독교가 무지성이거나 강압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 설명을 제대로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한 존재이기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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